원응 스님 (벽송사 회주) 하심이 커지면 원수까지도 포용 밤새도록 소나무 위로 비가 후드득거렸고, 빗소리는 귀에 가득히 쏟아져 들어왔다. 다음 날 새벽 서암정사가 있는 지리산은 온통 안개로 휩싸였다. 청빛 어둠 속을 더듬어 굴법당에 들어섰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미타불, 부처님의 십대제자가 조각된 굴법당은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였다. 35년이나 걸려서 굴법당을 조성한 원응 스님의 원력을 생각하면서 부처님께 나붓이 3배를 올렸다. 포대화상의 웃음을 떠올리게 할 만큼 환한 웃음을 짓는 원응 스님 앞에 앉았다. 풀 베고 돌 져다 나르는 일에 평생을 바친 원응 스님의 손은 거칠고 굳은살이 덕지덕지 박혀있다. 스님은 어떤 큰 원력을 세웠기에 방대한 <화엄경>을 15년에 걸쳐서 두 번이나 사경할 수 있었으며, 수십 년의 세월동안 힘들다 생각하지 않고 굴법당을 조성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였다. “부처님께 발원을 할 때는 자기를 위한 것인지 중생을 위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봐요. 큰 원을 가진 사람은 큰 성취를 하게 되고 작은 원을 세우면 작은 그릇 밖에 못 만듭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큰 원을 세우라고 합니다. 모든 부처님 수행에는 원이 있었어요. 절에 20~30년 다녔다고 자신은 큰 보살로 생각하지만, 아들 딸을 위해 기도하는지 아니면 중생을 위해 기도하는지 한 번 들여다보라고 말합니다. 중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보살이지. 자기 기도만을 한다면 아이들이 사탕 주면 좋아하는 것과 같아요. 이것이 다 자기에게 속는 일입니다.” 원응 스님의 은사 석암 스님은 선암사에서 살기를 권하였지만 원응 스님은 시끄러운 것이 싫어서 아무 연고도 없는 지리산 벽송사로 들어왔다. 전쟁으로 벽송사는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고, 스님은 복구할 엄두마저 나지 않았다. 오로지 참선수행에 마음을 모았다. 어느 날 석암 스님은 “십겁을 앉아 있어도 불법이 나타나지 않는다 했는데 소견이 생기던가?”하고 물었다. 원응 스님은 “불법이 나타나면 헛것이 아니겠습니까?”라는 대답을 하여 전법계를 받았다. 원응 스님은 낮에 굴법당 공사를 하시면서 밤에는 <화엄경> 사경을 하였다. 60만자나 되는 <화엄경>을 10년에 걸쳐서 사경하였고, 그 다음에는 5년 만에 금니사경을 끝내었다. 한국 불교계에 전무후무한 일이다. <화엄경 약찬게>를 독송하다보면 53선지식의 명호가 나오는데 그것을 외우면 공덕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경전 몇 자 알고 외운다고 해서 깨달아지겠는가? 내 마음을 통해서 깨치는 참선이 낫지. 그래서 옛날 조사들이 참선하라고 한 것이지. 사람들은 ‘마음만 깨달으면 부처’라고 쉽게 말하는데 그것 깨닫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나는 하심 하는 것이 불교 전체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하심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일이며, 또 나를 버리는 것이다. 왕후장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초심으로 돌아가서 남을 받들고 봉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그것이 바른 길이란다. “처음에는 인연 있는 사람에게만 하심하게 되지만 마음이 커지면 인연 없는 사람까지도 포용하게 됩니다. 하심을 하면 원수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부처님 세계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남을 정복해서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포용하려고 해야 합니다. 회사 다니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하심으로 일하면 남에게 인정을 받아요. 중생들은 이기심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는데, 이렇게 하심 하다보면 아상이 끊어지고 자타(自他)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자타가 둘이 아닌 세계는 내가 온전히 비워진 깨달음의 세계이다. 나도 비우고 너도 비우고 모든 사물을 비워 버린 세계가 공의 세계인 것이다. 아무 것도 없다면 공의 세계가 될 수 없다. 비워진 만큼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비워버렸다는 것은 벌써 모든 것이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다. 다 비워버리면 모든 사람을 품어 안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것이 곧 나를 이기고 남을 이기는 것이다.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겨야 한다는 그 마음이 바로 중생심이란다. 하심하기가 힘들다고 엄살을 부렸더니 “그러면 부처님도 그만큼 힘들지” 라면서 허허 웃으신다. “참선한다고 앉아있으면 다 깨달아지나. 그래도 부처님 흉내라도 내야지. 좋은 모습을 흉내 내다 보면 처음에는 위선에 속하지만, 거듭하다 보면 위선이 사라지고 진짜가 되어버리지. 말더듬이 흉내 내다가 말더듬이가 되어버리듯이, 위선이라도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참선한다고 앉아있어도 마음은 동서남북을 왔다갔다하면서 망상 속에 있지만 그렇게라도 하다보면 10년 20년 세월이 지나면 이루어지는 것이지.” 원응 스님은 출가 전부터 부친으로부터 ‘이뭣고’ 화두를 받아 참선을 하였다. 행자 때는 ‘시심마행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하지만 스님은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선(禪)은 죽은 선이라고 한다. 노동선을 주창하시는 것이다. “누구나 편한 것을 좋아하지만 이 산중에서 일 안 하고 살 방법은 없어요. 남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 보살도인데 그늘에서 부채나 할랑할랑 부치고 있는다면 절집에 백날 있어봐야 아무 소용없지. 일을 안 하면서 무슨 공부가 되겠는가? 산중에 살려면 자기 스스로 꾸려갈 수 있는 용맹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상좌들에게 일을 잘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젊은 시절에 눈을 너무 혹사한 탓인지 눈이 많이 쇠약해져서 소일 삼아 부처님의 경구를 쓰신다. 평생을 한시도 쉬지 않고 노동과 정진을 해 오신 스님은 ‘산중에서 공부도 안하고 허송세월만 보냈다’고 한탄하였다. 스님의 말씀이 타성에 젖어 안일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오히려 죽비가 되어 한 대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노동자의 손같이 굳은살이 턱턱 박혀있는 원응 스님의 손이 바로 부처님의 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처님의 손을 한 번 잡아보고 싶었다. 글·사진=문윤정(수필가·본지논설위원)
출처:부다피아/편집:(http://dochang.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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