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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좋은글 올려주십시오.한발 다가서는 좋은 인연을 반깁니다.부처님은 밝은 마음에 복을 주십니다.
작성자 道窓스님
작성일 2006-09-25 (월) 11:53
ㆍ조회: 600  
전북 불명산 화암사

  전북 완주 불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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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절집은 있는 그대로 남겨졌으면...

 

 

 

오후 늦게 장맛비가 시작된다고 하더니만, 노령 고개 넘어 전라북도 땅에 들어서자마자 심상치 않은 빗줄기가 차창에 들이칩니다. 여름철 따가운 햇빛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좋았지만, 잿빛 하늘에 우산을 받쳐들고 화암사(花巖寺)에 오를 일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옵니다.

호남고속도로 삼례 나들목을 나와 봉동읍에 접어든 후 17번 국도를 따라 대둔산을 향해 가는 길은 꽤 먼 길이지만 지루하지 않습니다. 오른편으로 가장자리로 물풀이 일렁이는, 요란하지 않은 강이 보이는가 싶더니 눈을 돌려 왼편을 보면 다 자란 대추나무들이 숲을 이루는 초록이 신선합니다.

빛이 바랜 담배 가게 표지판이 아슬아슬 매달려있는 가게 앞의 낡은 평상 마루가 정겹고, 모내기가 끝난 넓은 무논 안에서 홀로 일하는 젊은 농부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곧추 가는 듯하다가 부드럽게 꺾이고, 운전대를 잡은 몸이 쏠릴 만큼 굽어진 듯하다가 반듯해지는 왕복 2차선의 충청도 넘어가는 이 길은 화려한 빛깔의 꽃과 나무를 노변에 심는 등 곱게 단장하지는 않았지만, 일상 그대로 꾸미지 않은 편안함이 느껴지는 추천할 만한 '드라이브 코스'입니다.

경천면 소재지를 바로 지나 차량 두 대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얼마 전 포장된 듯한 농로를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면 막다른 곳에 넓은 공터가 있습니다. 화암사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공간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어느 누구나 걸어야 합니다.

절 안까지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도로를 낼 요량이었던지, 화암사가 자리한 불명산(佛明山) 중턱을 깎아낸 흔적이 성터 자국처럼 남아있어 아쉽긴 하지만, 우리가 오를 곳은 그쪽이 아닙니다. 아무도 보살피지 않아 반쯤 누워버린 화암사 안내판의 지시에 따라 하늘이 울창한 숲에 가려진 초록의 터널을 풀벌레들의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걸어 올라야 합니다.

풀벌레 소리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급한 경사의 바위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낭랑한 물소리를 만나게 됩니다. 2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작은 폭포의 씩씩한 물소리도, 조그만 자갈 틈새로 삐져 나오는 수줍은 물소리도 좋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암사 가는 길은 만만치 않은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며 가야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묵직한 철제 계단이 놓여 있어 과거 사용되었던 길의 흔적은 오르면서 둘러보는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즈음 '불명산 화암사'라는 현판이 눈앞에 걸려 있습니다. 절집이 아니고 그 옛날 전쟁이 흔했던 시절 제법 유용하게 쓰였을 법한 요새입니다. 그 흔한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습니다. 가장 먼저 손을 맞는 것은 고작 돌무더기 축대 위에 얹어놓은 낡은 목조 건물 한 채입니다.

기둥을 갖춘 누각 건물일진댄 그 누마루 아래로 손의 출입을 허락할 법도 하건만, 오히려 성벽 쌓아올리듯 석축으로 닫아버린 채 그 옆에 조그맣게 터놓은 문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합니다.

▲ 오려내어 적묵당의 지붕을 받아준 극락전 맞배지붕의 풍판
ⓒ2004 서부원


문지방을 지나면 중정(中庭)에 들어섭니다. 10평쯤 되려나. 정방형의 중정 주변을 성곽처럼 생김새도 크기도 가지각색인 네 채의 건물들이 틈새 하나 만들지 않은 채 에워싸고 있습니다. 오른편의 가장 작은 건물인 불명암(佛明庵)을 제외하면, 세 채의 건물들이 회랑처럼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겁니다.

맞배지붕 양식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측면의 방풍판조차 옆 건물 지붕의 침범(?)에 의해 잘라낼 만큼 화암사의 중정은 완전히 고립된 느낌입니다. 비를 머금은 채 중정은 연둣빛으로 화사하게 단장되어 있습니다.

화암사 극락전은 고건축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웬만하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건축물입니다. 학계에 보고된 우리나라 유일의 '하앙식(下昻式)' 건축물입니다. 지붕의 하중을 받는 공포(拱包) 위에 하앙을 덧댄 후 도리를 더 얹을 수 있게 함으로써 서까래를 건물의 바깥쪽으로 길게 뽑을 수 있게 만든 백제계 건축 양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중국 남부와 일본 등 강수량이 많은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고건축 양식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건축학적 가치를 접어두고라도 이 건물이 지닌 구경거리는 참 많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저곳 두루 다녀봤지만, 건물 현판이 글자 수대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처음 봅니다. '극(極)', '락(樂)', '전(殿)' 이 세 글자가 모두 낱개 현판 3개로 나뉘어져 걸려 있습니다.

무슨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재미있는 파격입니다. 또, 절의 규모 만큼이나 작은 소박한 건물이지만 불상을 모셔둔 건물 내부의 닫집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 학계에 보고된 우리나라 유일의 하앙구조 건축물인 화암사 극락전
ⓒ2004 서부원


비가 내리는 날, 화암사의 주인공은 극락전이 아니라 건너편의 우화루(雨花樓)입니다. 제 나름대로의 해석이지만, '비가 꽃이 되어 흘러내리는 누각'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처마를 타고 흘러내려 중정의 연둣빛 바닥에 들치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그 모습이 건물 오른편에 외롭게 매달려있는 색 바랜 목어(木魚)와 겹쳐지면서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연출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화루는 화암사 입구에서 손을 맞았던 돌무더기 축대 위의 무뚝뚝한 건물인데, 안에서 보니 바깥에서 볼 때와는 아주 달라 보이니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우화루의 두 얼굴은 화암사 답사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유명하다는 극락전보다 한 발(?) 앞서 국가지정 보물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극락전은 보물 제663호, 우화루는 보물 제66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우화루 입구에 덩그러니 내걸려있는 색바랜 목어
ⓒ2004 서부원


화암사가 지닌 별미는 또 있습니다. 극락전과 요사채로 쓰이는 적묵당이 맞붙은 틈 사이로 돌아 나가면 야트막한 둔덕 위에 한 칸 짜리 산신각(山神閣)이 서 있습니다.

여느 절집의 것들과 다를 바 없지만, 산신이 주재하는 곳으로써의 권위(?)가 서지 않는 '가엾은' 건물입니다. 바로 오른편에는 스님들의 찬거리를 위한 고추, 깻잎 등이 심어져 있고, 왼편으로는 질박한 분위기를 내는 장독대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절이 아니라면 흡사 곡식이나 소금 등을 쌓아두는 창고쯤으로 여길 만한 건물입니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문을 열어 만난 벽면 그림 속의 산신은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 여느 양반집의 곡식 창고처럼 뒷뜰에 외롭게 서있는 산신각
ⓒ2004 서부원


화암사 경내는 물론 주변이 전혀 번잡스럽지 않습니다. 그 흔한 구멍가게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 17번 국도에서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에 이르는 농로가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되었고, 오는 길 군데군데에 포크레인 몇 대가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불길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람의 손때를 가장 덜 탄, 몇 안 되는 절집 중의 하나입니다.

지역의 산업 발전이 시급하고, 열악한 농어민의 생계도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지만, 화암사와 같은 차분하고 고즈넉한 절집 적어도 몇 개 정도는 영구히 보존하고 소중하게 간직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화암사에는 지금껏 보아온 여느 절집과는 분명히 다른, 그만의 '절집다움'이 스며있습니다.

 

* 오마이뉴스/서부원기자(2004. 7.12)


 
 
 
 
 
 2
 
 
 
 
 
 
불명산 화암사로 오르는 길은 고요하다. 그 고요 속 선정에 든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들이 제 몸을 조금씩 숲 안쪽으로 들여앉혀 만들어 낸 사잇길을 걸어오르노라면 문득 <한산시(寒山詩)> 한 구절이 마음을 스쳐간다.

“금일귀한산(今日歸寒山) / 침류겸세이(枕流兼洗耳)”
(내 오늘에야 비로소 한산에 들어 개울을 베고 귀를 씻노라)


 
‘귀를 씻는다’는 것은 아마도 ‘세심(洗心)’을 이름일 터. 나 또한 옛 사람 한산자(寒山子)를 흉내내어 맑은 물 몇 줌 떠올려 귀를 씻고 마음의 티끌을 씻어낸다. 내 번뇌의 무게는 과연 몇 근이나 가벼워졌을까.

계곡이 앞서는가 싶으면 어느 새 산길이 앞서고 산길이 앞서는가 싶으면 계곡이 따라잡는다. 산길이 점점 가팔라졌다. 크고 작은 폭포들이 제 존재를 드러낸다. <죽장망혜>라는 단가 한 자락을 가만히 읊조려 본다.

“죽장망혜단표자(竹杖芒鞋單瓢子)로 천리강산 들어가니, 폭포도 장히 좋다. 여산이 여기로구나.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은 옛말로 들었더니, 의시은하하락구천(疑是銀河河落九天)은 과연 허언은 아니로구나.”

-대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조롱박을 찬 단출한 차림으로 천리강산을 들어가니 여산(중국의 산)이 바로 여기로구나. 삼천 척이나 되는 듯 나는 듯한 폭포가 곧장 쏟아져 내린다는 말을 (예전에는) 허사로 들었더니 (오늘 보니) 마치 저 높은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 하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로구나.

 

 



 

▲ 철제 계단이 놓이기 전 옛길

 

ⓒ2004 안병기

▲ 새로 가설한 철제 계단
ⓒ2004 안병기

그러나, 갑자기 눈 앞에 흉물스런 붉은 철제 계단들이 출몰하고, 이 느닷없는 풍경의 반전 앞에서 내 도도한 감흥은 싸늘히 식어버린다. 1983년 폭포 위로 백 사십여 개가 넘는 철제 계단이 놓임으로써 화암사를 찾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일주문이나 천왕문, 금강문이 따로 없는 화엄사는 절에 이르는 험난한 진입로가 일종의 산문의 구실을 감당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 계단이 생김으로써 절에 대한 접근성은 훨씬 용이해졌지만 그 대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경건함과 성스러움은 스러져 버렸다.

더구나 이 붉은 철제 계단 아래 감춰진 폭포들이야말로 화암사가 보여 줄 수 있는 최대의 절경이다. 이제 수십 길 폭포가 보여주는 장엄한 풍경은 철제 계단 아래 숨어버려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옆 계곡을 거슬러 올라 벼랑 끝으로 나 있는 옛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그렇게 힘들다거나 별로 위태로운 길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철제 계단을 놓은 것일까.

철제 계단을 오르고 아주 작은 섶다리를 건너가면 “불명산 화암사”라는 현판을 단 2층 누각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서방정토의 입구로서의 누각들은 누하(樓下) 진입을 허용하지만 이 우화루라는 누각은 누하를 아예 석축으로 쌓고 막아버려 진입을 원천봉쇄해 버렸다. 그러므로 부처가 계시는 불국토인 절집으로 들어가려면 우화루 옆 문간채에 난 작은 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 화암사 들어가는 문간채 대문의 문미와 문턱
ⓒ2004 안병기

문턱과 문미가 둥글게 휘어진 이 작은 대문의 아름다움은 밖에서 보다 안에서 밖으로 내다볼 때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동그란 문턱이 턱을 괴고 있기 편해서일까. 화암사에 적을 둔 견공 한 마리는 틈만 나면 문턱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

어느 시인은 그 견공의 귀가 하도 깨끗해서 뒷산 다람쥐 도토리 굴리는 소리까지 다 듣는다고 설레발을 쳤지만 내가 보기엔 그 견공도 산중 생활이 적적하고 무료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누렁이는 턱을 괴고 앉아 있다가 절집을 찾는 객(客)이 나타나면 “얼씨구, 절씨구, 칠씨구, 팔씨구” 제 흥에 겨워서 객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그리운 세간의 냄새를 킁킁거린다.

▲ 화암사 극락전
ⓒ2004 안병기

화암사는 극락전과 우화루가 북과 남으로 마주보고 적묵당과 불명당이 동과 서를 마주보고 있는 ‘ㅁ’ 자형으로 당우를 배치한 아담한 절집이다. 보물 613호인 화암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이다. 잡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 볼 때 가운데 기둥의 높이가 제일 낮고 추녀 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귀솟음 형식을 취했다. 이는 건물 양쪽 어깨가 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지양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시대 이후 목재의 부족으로 지붕을 많이 빼지 못하게 되자 건물 측면을 바람으로부터 막아주기 위해 풍판(風板)이 생겨났는데 조선시대에 다시 지어진 화암사 극락전에도 역시 지붕 양쪽 박공 밑에 역시 풍판을 댔다. 좁은 건축공간을 활용하다보니 적묵당의 지붕 끝이 극락전의 풍판을 뚫고 들어오게 되었다.

▲ 전면 하앙. 용두각으로 투각되었다.
ⓒ2004 안병기
▲ 후면 하앙. 단순하게 삼각형으로 처리되었다.
ⓒ2004 안병기

화암사 극락전은 또한 국내에서 유일하게 하앙(下昻) 구조를 가진 건축물이다. 하앙이란 밖으로 돌출한 출목도리를 받을 수 있게 서까래 방향으로 거는 부재의 일종으로서 처마를 길게 빼기 위한 공포 형식이다.

밖으로 뻗어나온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어 건물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막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유난히 강우량이 많은 호남 지역에 적합했던 건축양식이다. 전면의 하앙은 용머리 모양으로 투각한 화려한 장식인데 반해 후면의 하앙은 간결한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다듬어 놓았다.

▲ 화암사 보궁형 닫집
ⓒ2004 안병기

극락전의 부처님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하여 좌협시에 관세음보살 우협시에 대세지보살을 모셨으며 그 위에는 보궁형 닫집이 얹었다. 세 겹으로 된 지붕의 서까래와 공포가 치밀하게 짜여져 있으며 구름 속의 용두와 동자상이 닫집 주위를 날고 있어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 부처를 그려넣은 극락전 공포 아래에 있는 불창
ⓒ2004 안병기

다포계 건축물에는 창방 위 주두 사이로 마치 사람이 앉아 있는 듯한 형태의 빈 공간이 있는데 이른바 공포 벽화불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을 메우고 벽화를 그리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건축용어로는 불창(佛窓)이라 부른다.

본래는 개방돼있던 이 창을 막아 부처님을 그려넣는 불창의 변형된 형태인데 아직도 불창을 막지 않은 옛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부석사 안양루의 불창은 해가 지고 불이 켜지면 마치 여러 분의 부처님이 좌정해 앉아 있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극락전 오른쪽에는 철영재(綴英齋)라는 작은 당우가 있다. 이 생소한 이름의 당우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꽃부리를 깁는다‘는 뜻인데 화암사 공양주 보살에게 그 뜻을 물으니 ’입을 삼가라‘는 의미라고 한다. 아마도 풍수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듯 하다. 철영재 뒤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깍지똥만한 작은 부도 1기가 홀로 서 있는데 앙증맞기 그지없다.

▲ 적묵당 쪽서 본 우화루
ⓒ2004 안병기

사찰의 누는 그곳에서 설법을 행한다는 점에선 법당과 같은 성격을 지닌 당우이다. 우화루(보물662호)는 고승대덕이 그 위에 올라 설하는 심히 깊고 미묘한 부처님의 법을 들고 중생들의 환희에 벅차 있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는 것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우화루는 밖에서 보면 2층 누각이지만 안에서 보면 1층이다. 우화루의 마루바닥과 안 마당의 지면을 일치시켜 좁은 마당을 넓게 보이도록 배치했다. 시각적으로 마당을 넓게 보이게 할 뿐 아니라 두 공간을 자연스럽게 이어 붙여 넓게 쓰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우화루 안 오른쪽에는 목어가 걸려있다. 형태상으로 순천 선암사의 것과 약간 닮아있는 화암사 목어(木魚)는 단청이 완전히 벗겨진 탓인지 소박하다 못해 약간 애처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적묵당과 불명당은 승방이자 요사채이다. 적묵당은 ‘ㄷ’자형으로 된 건축인데 앞마당 쪽으로는 툇마루가 깔려 있고 뒷마당 쪽으로는 장독대가 있다. 장독대 옆에 자리한 산신각은 정말 ‘성냥갑’만 하다.

▲ 극락전 풍판을 뚫고 들어간 적묵당 지붕
ⓒ2004 안병기

이 적묵당의 양쪽 지붕 끝은 우화루의 풍판과 극락전의 풍판을 뚫고 들어가 기생하고 있다. 넉넉하지 못한 공간이 건물간의 상생을 유도한 것이다. 극락전과 우화루는 적묵당에게 자신의 풍판을 뚫고 들어오도록 곁을 내준다.

이 화암사의 당우들은 그 건축 자체로서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곁들여 사랑과 관용의 원리까지 보여 주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아닐 수 없다.

여름 한낮 적묵당 툇마루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절 마당을 바라본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은 채 모든 움직임을 그친 네모난 공간이 적막했다. 비어있는 것은 적막하다. 우리 시대에서 적막 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

난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소리에 중독되어 살았던가. 자동차 경적, 휴대폰 벨 소리, 그리고 소음 보다 더 지독한 음악이라는 이름의 잡음 속에 묻혀 살면서 차라리 적막을 갈구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할 수 있다면 적막, 그 니르바나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화암사 절 마당에 머물고 싶었다.

화암사를 빠져나와 서쪽으로 쌓여진 축대를 끼고 돌아 야트막한 산자락으로 올라갔다. 15C에 쓰여진 화암사 중창비가 거기 있었다. 거의 글자를 읽기 어려울 만큼 풍화되어 버린 비문을 들여다본다. 중창을 마친 이듬해(1441) 비문(碑文)을 지었는데 왜 선조 5년(1572)에 비를 세웠을까.

산길을 자박자박 걸어 내려간다. 철제 계단이 아닌 옛 산길을 더듬어서. 한참을 내려가다 우연히 부도 2기가 서 있는 화암사 부도밭을 만난다. 부도 하나는 깨어진 것을 붙여놓았다. 화암사는 이래저래 곡절이 많은 절이다.



人間世(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열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안도현 詩 <화암사(花巖寺), 내 사랑> 전문(全文)

 
안도현 詩 <화암사, 내 사랑>을 기억해내며 발길을 서두른다. 이 숲을 벗어나면 다시 소음과 잡음으로 가득찬 사바진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에 지칠 때마다 난 화암사의 적막을 못내 그리워하리라
 
 
 
 
* 오마이뉴스/ 안병기기자(2004.8.7)
 
 
 
▲ 오정숙 선생이 거처하는 동초각
버스로 가는 길-전주역 앞에서 화암사행 버스 이용

승용차로 가는길-전주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봉동→고산→경천→용복 주유소에서 구계마을을 거쳐 4.5km 가면 된다.

화암사를 나와서 17번 국도를 타고 대둔산 방면으로 가다보면 운주면 산복리 주암마을을 지나게 되는데 마을 안 원적골 <동초각>에 들르면 판소리 명창 오정숙 선생의 사는 모습과 함께 제자들 가르치는 소리 한자락도 얻어 들을 수 있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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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전과 적묵당의 지붕 끝이 서로 끼워져 의지한 채 수백년을 보냈다.
ⓒ2005 이승열

 
▲ 싱싱하고 잘 마른 노란빛의 북어를 연상시켰던 목어가 살이 푸석거린다. 빨리 제 때깔을 찾았으면...
ⓒ2005 이승열

좋은 풍경을 보면 좋은 사람이 생각난다. 화암사 적묵당 마루에 하릴없이 사그라지던 빛이 내 안으로 스며들 때도 문득 그랬다. 요원들과 함께 이곳에 오고 싶었다. 이곳의 풍경, 빛, 공기, 느낌을 나누고 싶었음이 더 적당할 듯싶다.

위아래로 스무 살쯤 차이가 나는 친구들이 몇 명 있다. 정확히 서로의 나이를 모른다. 한두 번쯤 근데 몇 살이야? 하고 물은 적이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런데도 모른다. 세상살이에 좀 서툴고 약간의 자폐 증상이 있어 모임 같은 것은 절대 못하는 사무실의 '왕따' 내지는 '자따'들이다.

일년에 딱 한번씩 길을 떠나는데 우린 그것을 여행이라 부르지 않고 '연수'라 부른다. 평생 공부만 했던 남편 마음 상할까봐 여행의 '여'자도 못 꺼냈던 N, 중3이나 되는 아들 밥 때문에 떠남을 꿈조차 꿔본 적이 없는 J, 여자들끼리의 여행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 남편이 있는 S, 가족 없이 한번도 혼자서는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는 제주에서 날아온 K, 용감해 보이는 것은 껍데기뿐 다들 사정은 비슷하다.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화암사 절개'

▲ 세상을 사는 가장 강력한 무기 미모? 절개가 저토록 그윽한 눈길을 보내는 것을 처음 봤다.
ⓒ2005 이승열
작년 겨울 그 연수의 첫 번째 여행지가 화암사였다. 지난 가을 내가 느꼈던 화암사의 느낌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화암사로 향하는 오솔길에서 모두들 감격했다. 적당히 싸늘한 냉기, 딱 이틀뿐이지만 그래도 함께 여행을 떠났다는 뿌듯함. 온 몸으로 자연의 기운을, 나무의 기를 받아들여야 다시 일년을 버틸 힘이 축적된다. 이건 유희가 아니라 견디어낼 힘을 얻는 담금질의 시간이다.

화암사는 해체 보수공사 중이었다. 적묵당이 산산이 분해되어 대문이 폐쇄되고 우화루 옆 축대에 철난간을 걸쳐 그곳으로 드나들게 했다. 적묵당 마루에 엉덩이 걸치고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리란 계획은 틀어졌지만 그래도 모두들 만족했다. '극락전' 따로 떼어진 현판을 찾고 용머리를 찾으러 극락전 앞으로, 용꼬리를 찾으러 극락전 뒤로 바삐 좀 과장스럽게 움직였다.

화암사 '절개'가 아까부터 눈에 보이지 않더니 제일 어린 예쁜 후배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아니 이런 배신이? 화암사로 향하며 너의 그 절개, 지조, 영특함을 침 튀도록 이야기했건만 나만 거짓말쟁이가 돼 버렸다. 이젠 아예 드러눕고 애교를 부린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후배 옆에서 의젓하게 포즈를 취하며 아련한 눈길을 서로 맞춘다.

아직도 화암사 적묵당은 해체 중

올 여름 휴가를 몽땅 엄마와 함께 지냈다. 아이 낳고 산후조리 후 처음 갖는 긴 시간이었다. 원래는 세 자매가 배낭으로 티베트를 가려 했는데 아시아나 파업으로 표가 없어 일단 포기. 다시 패키지로 예약. 여행할 팔자가 아닌가 보다. 이번에는 엄마의 건강에 조금 이상징후가 보였다. 딸 셋 모두 여행을 포기하고 엄마와 지내기로 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아니었다.

양촌에 가서 쏘가리 매운탕을 먹으면서 가까이 다녀올 곳을 찾기로 했다. 고향집에 간 것처럼 반가이 맞는다. 아저씨가 직접 포획한 까치 구경도 하고 텃밭에서 딴 복숭아도 덤으로 받고 불명산 화암사로 향했다. 지금쯤은 보수 공사도 끝났을 터였다.

▲ 화암사 입구 오솔길. 산림욕이 따로 없다. 엄마와 아버지는 개울가에, 우리는 화암사에.
ⓒ2005 이승열
공사차량이 다녔던 길을 이용하면 화암사까지 갈 수 있건만 엄마는 절대 응하지 않는다. 왜 굳이 가지 말라는 길을 가냐고 그냥 아래 개울물에서 발 담그고 기다리겠단다. 개울가에 엄마, 아버지, 조카가 남고 딸 셋만 화암사로 향한다. 한낮의 태양이 이제 조금씩 사그라들고 숲도 제 색깔을 찾는 시간이다.

스님이 막 극락적 문에 자물통을 채우고 돌아서고 있었다. 대문을 지키고 서서 저녁 시간 길손을 차단하던 화암사 절개도 반갑게 꼬리를 흔든다. 적묵당 보수를 하며 화암사의 동선이 바뀌어버려 절개도 좀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이미 어둠이 깃들기 시작해 극락전 처마 끝의 풍경이 더욱 선명하다.

스님 마음이 약해졌다. 되돌아와 극락전 열쇠를 가만히 내 놓는다. 조용히 합장하고 잠시 침잠의 시간을 갖고 스님의 화암사 이야기를 들었다. 화암사에 기거하면서 얼마나 화암사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는가가 절절이 느껴졌다.

▲ 수백년을 견뎌온 신토불이 느티나무 기둥과 몇해전 교체한 수입산 기둥
ⓒ2005 이승열

 
▲ 화암사. 산신각도 장독대로 극락전도 적묵당도 모두 바위 위에 핀 꽃!
ⓒ2005 이승열
몇 해 전 보수 공사를 끝낸 극락전의 기둥을 비교했다. 수 백 년 전 절 앞 느티나무를 베어 세운 기둥이 지그재그로 나뭇결을 드러낸 채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얼마 전 해체한 후 바꾼 수입산 기둥은 결은 일직선이다. 작은 차이처럼 느껴지나 결이 곧게 갈라지면 힘이 없어 무거운 지붕을 견딜 힘이 없단다. 결이 지그재그로 갈라져야 지붕도 안정이 되고 기둥도 오래 가며 힘을 받는다고 했다.

기둥, 서까래, 대들보, 공포 모두 번호가 매겨진 채 무장 해제되어 끼워 맞혀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바위 위에 달랑 앉은 적묵당 뒤 산신각에 가니 화암사(花巖寺)의 의미가 확연히 다가온다.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은 산신각, 장독대뿐만이 아니었다. 극락전, 적묵당 모두 바위 위를 깎고 그 위에 세운 전각들이라 했다. 겹겹이 포개진 불명산 꽃 잎 속에 화암사가 꽃술이 되어 중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 했다.

▲ 우화루 아래 유생들의 흔적. 음주가무를 즐긴 자랑스런 무용담. 날짜까지 정확히 기록해 놓았다.
ⓒ2005 이승열

 
▲ 아궁이 속 구들 입구의 나무. 수백년동안 조금씩 타 들어가고 있었다.
ⓒ2005 이승열

해체 중인 적묵당은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궁이에서 구들로 들어가는 입구의 나무가 송진에 절고 불의 열기에 타서 형태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나무로 지은 집은 화재에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보이지 않는 구들 밑에서 수백년을 조금씩 타고 있던 나무가 어느 날 불씨가 되어 고스란히 수백 년을 잿더미로 만든다고 했다.

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우화루 현판 아래 조선시대 유생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기생들을 대동하고 이곳에서 음주가무를 얼마나 질펀하게 즐겼나를 날짜까지 세세히 다 기록해 놓았다.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손으로. 우화루 옆 벽에는 현대판 유적이 가득하다. 나 여기 다녀갔노라고… 아무리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좀 서글프다.

▲ 골조만 앙상히 드러낸 해체된 적묵당. 보수하지 않으면 폭삭 사그러질 것 같이 위험했다.
ⓒ2005 이승열

 
▲ 지붕을 가렸다고는 하나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돼 있어 안타까웠다.
ⓒ2005 이승열
6개월 예정의 보수 공사가 끝났을 화암사를 상상하며 왔다고 말하자 스님이 허허 웃는다. '우리는 절대 손 못 대요. 국가지정 문화재라서.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작년 9월에 시작했는데 앞으로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앞서는 스님의 신발이 한여름인데 털신이다.

다음 번 화암사에 올 때는 여름 신발 한 켤레 사오자는 동생의 의견이다. 손을 저으신다. 텃밭에도 해체 중인 적묵당 안에도 뱀들이 놀러와 늘 발등을 덮는 신을 신어야 한단다. 전혀 덥지도 불편하지도 않단다. 화암사 절개의 눈이 짓물러 있다. 사람 나이로 치면 일흔에서 여든,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정 많은 노년이란다.
 
 
* 오마이 뉴스/ 이승열기자(2005.9.15)
<언제까지 해체된 몰골로 세월을 견뎌내야 할지 스님도 전혀 모른답니다. 다시 화암사 적묵당 마루에 앉아 해바라기 하는 날을 기다립니다
이름아이콘 선덕화
2006-09-25 22:27
 _()_()_()_
   
이름아이콘 가성화
2006-09-28 22:52
 _()_()_()_
   
이름아이콘 우주
2006-11-04 03:59
 _()_()_()_
   
이름아이콘 묘락행
2006-11-13 14:01
 _()()()_
   
이름아이콘 德山
2008-03-1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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